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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한 감독 계약기간, 야구계 '신뢰'가 사라진다

이원만 기자

기사입력 2012-09-18 12:20 | 최종수정 2012-09-18 12:20



'계약'은 두 주체가 서로의 신용과 믿음을 담보로 맺은 약속을 뜻한다.

계약의 주체들이 개인 대 조직이든지 개인과 개인이든지 혹은 조직과 조직 사이든 상관없이 계약의 속성은 동일하다. '서로 약속한 바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주체가 서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상호간에 신뢰를 깨트릴 만한 행동이나 손실을 입히지 않는 한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그렇지 못한 행위, 즉 '계약의 일방적 파기'는 몰상식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이러한 '몰상식'이 판을 치고 있다. 엄연히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감독을 구단이 일방적으로 내치는 일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이런 분위기가 어느 특정 구단이 아닌 전체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현장과 프런트간의 '신뢰'는 사라지고,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던 관계는 마치 '갑'과 '을'처럼 뒤바뀌고 있다.


지난 2010년 열린 올스타전 서군 코칭스태프&21745; 넥센 김시진 감독이 경질되면서 이들 모두 &35829;전 감독&36085;이 됐다&21745; 네 명 모두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했다&21745; 스포츠조선DB
계약직 영업사원으로 전락한 감독의 위상

최근 몇 년간 프로야구계에 몰아친 '감독 경질' 칼바람을 보면 마치 구단이 감독을 일종의 '계약직 세일즈맨'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계약 기간 내에 정해진 '판매량', 즉 팀 성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계약이 해지되거나 퇴출 대상이 되는 분위기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3년 동안 무려 7명의 감독이 계약기간을 적게는 몇 달, 많게는 4년이나 남겨둔 시점에 팀을 떠났다. 이중 지난해 스스로 용퇴를 결정한 김경문 전 두산 감독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본인의 의사가 아닌 타의, 즉 구단의 뜻에 의해 옷을 벗었다.

2010년 시즌을 마친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의 계약기간이 남아있지만, 그룹 고위층의 뜻에 따라 팀을 떠났다. 물론 '자진 사퇴'로 표현됐다. 김성근 전 SK감독은 2011시즌 도중 구단 프런트와 불화를 겪던 중 해임당했다.

박종훈 전 LG 감독은 2011시즌을 마치고 성적부진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는데, 계약 기간이 3년이나 남아있던 터라 야구계에서는 사실상 '경질'로 받아들여졌다. 조범현 전 KIA 감독 역시 2011시즌 팀이 준플레이오프에서 SK에 패한 뒤 팀을 떠났다. 팀을 그해 포스트시즌에 올려놨고, 선수 육성 등에서도 그간 성과를 보인데다 계약 기간도 1년 남았지만, KIA는 조 감독이 '자진사퇴'했다는 상식 밖의 발표를 했다.


올해 역시 한대화 전 한화 감독과 김시진 전 넥센 감독이 갑작스럽게 경질됐다. 한화의 경우 정승진 사장이 스스로 "시즌 중 교체는 없다"는 말을 해놓고, 불과 두 달 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꿔버렸다. 김시진 감독의 케이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자진사퇴'로 표현되긴 해도 사실상 구단의 주도에 의한 경질이라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성적 부진'인데, 이는 곧 구단이 보는 감독의 역할이 오직 '성적'을 내는 데에만 고정돼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말 그대로 '계약직 세일즈맨'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나마 일반 기업에서는 '계약직 세일즈맨'의 계약기간은 지켜주는 편이다. 이에 비하면 프로야구단의 감독 계약서는 종이조각일 뿐이다.


넥센 김시진 감독이 31일 목동야구장에서 펼쳐질 SK 전을 앞두고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목동=전준엽 기자 noodle@sportschosun.com/2012.05.31/
프런트와 현장, '갑'과 '을'이 돼서는 안된다

2010년 이후 현장을 타의에 의해 떠난 감독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박종훈 전 감독이나 한대화 전 감독은 이제 막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한 '새내기'였다. 김성근 현 고양 원더스 감독은 야구계의 원로이면서 국내 프로야구의 트렌드를 바꿔놓은 대표적인 지도자다.

또 김시진 전 감독과 선동열 현 KIA 감독은 프로야구 초창기의 대스타로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다. 조범현 현 KBO 육성위원장은 특유의 세밀한 선수육성과 치밀한 조직관리로 자신만의 지휘 스타일을 확고히 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명장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쓸쓸히 현장을 떠날 수 밖에 없던 것은 갈수록 구단의 힘이 현장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몇 년 새 젊은 감독들로 빠른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구단 프런트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로 보인다. 이제 막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는 젊은 감독들로서는 아무래도 구단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로인해 한국에서 9자리 밖에 없는 프로야구 감독에 대한 예우나 인식은 매우 낮아졌다. 감독의 권위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옅어지는 대신 구단의 요구사항이 점점 많아지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프런트와 현장의 우열관계가 기울어질 경우 자칫 '성적 위주'의 팀 운용만 강조될 위험이 있다. 육성과 투자, 리빌딩 등과 같은 요소들은 최근들어 더욱 더 철저하게 '기업논리'에 따르는 구단의 입장에서 보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에 해당한다. 당장의 성과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나 힘이 위축될 경우 이런 투자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어필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현장이 프런트에 끌려가면 결국 단시간 내에 성적을 낼 수 있는 식의 경기 운용을 펼치게 되고, 그로인해 거시적인 성장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프런트와 현장의 권력 관계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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