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 최악의 먹튀로 조롱받던 얼룩진 과거.
크리스 세일(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은 21일(한국시각) 올해 내셔널리그(NL) 사이영상 수상자로 뽑혔다. 총 30장의 1위표 중 26표가 세일에게 향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35세 이후에 사이영상을 차지한 6번째 투수로 기록됐다.
올해 29경기에 선발등판, 177⅔이닝을 소화하며 18승3패, 평균자책점 2.38의 호성적. 리그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225개) 1위를 모두 석권하며 트리플 크라운의 영광을 안았다. 사이영상은 자연스럽게 세일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유망주,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에이스에서 희대의 먹튀로 추락하며 오욕의 세월을 겪었다. '자전거를 타다 입은 손목 골절로 시즌아웃'이란 역대급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길었던 고난과 역경을 넘어, 선수 생활 말년으로 불려도 충분한 나이에 리그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다. 마른 체형과 큰 키, 스리쿼터의 격렬한 투구폼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렬한 직구와 역대급 슬라이더를 지녔다. 덕분에 '제2의 랜디존슨'이란 찬사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한번 터졌던 그 재능이 긴 암흑기를 지나 또한번 찬란하게 빛났다.
2010년 빅리그에 데뷔한 그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2010~2016) 두번의 17승 시즌(2012, 2017) 포함 72승을 올리며 간판투수로 활약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이적 첫해인 2017년에도 214⅓이닝을 소화하며 3번째 17승(8패, 평균자책점 2.90)을 달성했다.
2018년에는 158이닝 12승에 그쳤지만, 대신 소속팀 보스턴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5차전 9회 마지막 순간, 매니 마차도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LA 다저스를 꺾고 우승을 확정지은 주인공이 바로 세일이었다. 29세 시즌까지 세일의 커리어는 눈부셨다.
다만 한창 잘 나갈 때도 사이영과는 인연이 없었다. 마른 체형인지 경기 막판, 시즌 막판이면 페이스가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 다 잡았던 사이영상을 아쉽게 놓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악몽이 찾아왔다. 2019년 1억 4500만 달러에 5년 연장계약을 맺은 직후부터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2020년에는 토미존 수술(팔꿈치 내측인대 교체)을 받았고, 2022년에는 스프링캠프 도중 갈비뼈 피로골절을 시작으로 경기 도중 타구에 맞아 새끼손가락 골절을 당한데 이어 자전거에서 넘어지며 시즌아웃됐다. 이해 세일은 단 2경기, 5⅔이닝을 던지는데 그쳤다. '먹튀'라는 비난이 폭발할 수밖에.
올해초 보스턴을 떠나 애틀랜타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지난 5년간 세일이 소화한 이닝수는 476이닝에 불과했다.
애틀랜타의 도박수는 대성공했다. 생애 첫 사이영을 35세에 거머쥐었다. 5년 연속 사이영상 후보 톱5에 이름을 올렸다가 이후 5년간 순위권에서 이탈한 뒤 사이영상을 수상한 역사상 최초의 선수가 됐다.
자신의 불운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식단 관리부터 운동까지, 꽉 짜인 일정에 맞춰 최선을 다했다.
세일의 각오는 등번호에서도 드러난다. 애틀랜타 입단과 함께 랜디존슨의 등번호였던 51번을 택했다.
'초심'은 멋지게 통했다. 그 결과 '미친' 슬라이더가 돌아왔고, 영광을 품에 안았다.
"과거에는 성공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젠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낸 덕분에 지금 이순간을 더욱 즐길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는 세일의 수상소감이 마음속 깊이 와닿는 이유다. 각본없는 드라마 그 자체였다.
김영록 기자 lunarfl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