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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의 신' 서정권의 고향 순천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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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5. '복싱의 신' 서정권의 고향 순천을 가다



얼마 전 전남 순천에서 개최된 생활체육대회 복싱 경기를 참관하고 많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이 고장은 국내 최초의 세계랭커인 서정권(작고)의 탄생지이기 때문입니다. 서정권은 초창기 한국 복싱의 알파요 오메가였고,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었던 복서죠. 1929년부터 내리 2년간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을 석권했고, 31년에 프로에 전향, 일본 무대에서 기록적인 31연승을 거두며 복싱의 신으로 불렸습니다. 32년엔 상대가 없어 미국 무대에 진출, 한국인 최초로 세계랭킹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36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가 정신적인 붕괴로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게 되자 이를 아쉬워한 레슬러 역도산이 그의 이름으로 도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하면서 서정권의 복싱 인생은 전환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역도산의 어이없는 비명횡사로 서정권의 복싱 역사도 막을 내립니다.



또 하나 순천에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분이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생(작고)이죠. 그는 대표선발전에서는 손기정 선생보다 뛰어난 기록으로 우승한 전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분의 손자 중 한 명이 복싱 국가대표를 지낸 남영웅이라는 사실이죠. 이 분은 65년 제16회 전국학생선수권대회 중등부 모스키토급에서 전국을 제패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릅니다. 빠른 스피드와 지구력,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터지는 원투 스트레이트가 주무기였다는 것이 당시 그를 기억하는 복서들의 중론입니다. 그는 이듬해 플라이급으로 월장, 간판 이만도를 셧아웃시키며 주목을 받았고, 69년부터는 학생대표로 해외 원정을 다니기 시작했죠. 그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하고 있습니다. 70년 방콕아시안게임 페더급 선발전 때였습니다. 남영웅이 김현치와의 맞대결에서 패하자 비교적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고 생각한 남영웅의 부친이 지팡이를 들고 본부석까지 가 김택수 회장(작고) 앞에서 무력시위를 했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는 남영웅의 친형인 남행웅 전 원광대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해줬다고 합니다. 남영웅은 명지대에 진학해 신춘교, 남규철, 김승미, 김상만, 김충배 등과 함께 당시 대학 무대를 평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죠.



요즘은 엘리트 체육보다 생활체육대회가 더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자연스러운 패턴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화려했던 순천복싱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박경철 관장(45)은 현역 시절 국내 밴텀급 챔피언과 OPBF(동양태평양복싱연맹) 1위에 랭커된 복서였죠. 당시 싸움닭이라 불릴 정도로 매서운 파이팅을 선보였던 전형적인 파이터로 2000년 당시 20세의 전도유망한 우수신인왕 출신 김현숭(당시 8전전승)을 판정으로 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상걸, 조영주, 조삼훈, 정재광 등 당시 내로라하는 복서들과의 타격전은 승패를 떠나 관중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었죠.

박경철 관장의 소리 없는 조력자인 이향수 프로복싱 m프로모숀 회장(49)은 학창시절 빼어난 운동신경으로 주목받은 복서였지만 부상으로 복싱을 접고 순천에 정착, 사업에 성공하여 과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애착으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그는 지금도 스무 살 연하의 후배들과 스파링을 벌여 난타전을 펼칠 정도입니다.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죠.

또한, 과거 순천 금당고 시절 허영모, 성광배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뤄 전국 무대를 석권했던 최종달 순천복싱협회장(55)도 순천복싱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중후한 인품에 폭넓은 인간관계로 평판이 좋은 최 회장은 과거 화려했던 순천복싱이 부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더군요. 그는 순천 맹호체육관 동료인 허영모가 문성길과 2차전을 벌일 때 그의 필승을 위해 직접 세컨드를 봤는데 아쉽게 패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고 회고합니다.

순천복싱은 이외에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서권원과 신인왕 출신의 지말오, 지일구, 그리고 문성길에게 3연승한 김창렬 등 80년대 초반에 우수한 자원이 대거 쏟아진 복싱의 메카였죠.



프로복싱 WIBA(여성국제복싱협회)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이은혜(35)와 변교선 관장(51)도 경기장에서 만났습니다. 변 관장은 이은혜를 발탁하고 조련해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지도자죠. 이 두 사람의 만남에는 미담이 있습니다. 이은혜를 단번에 물건(?)임을 알아본 변 관장은 이은혜가 2015년 9월 태국 선수를 꺾고 WBO(세계복싱기구)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자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척박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은혜는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에 변 관장은 고육지책으로 직장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월급 전액을 이은혜 훈련비로 지급하며 살신성인의 지표를 보였고, 퇴근한 저녁엔 이은혜 챔프의 트레이너로 1인 2역을 병행하며 살아온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충호단 프로모숀' 박종운 대표(42)라는 조력자를 만나 활기를 되찾으며 이 챔프는 또다시 세계 정상에 등극, 스승의 은혜에 화답합니다. 이 타이틀도 현재 2차 방어에 성공해 통산 12전 11승(4KO승) 1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 있는 연예계 비화를 이은혜 챔프에게 들려줬죠. "1956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승주라는 소녀가 서울에 입성해 가수로 입문하기까지 헌신적으로 도와준 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김승주의 지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 후 '이 은혜'를 거꾸로 읽은 '혜은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에 데뷔했다"고. 얘기를 들은 이은혜가 반색하더군요.



'순천복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복서가 성광배(54), 성동현(27) 부자 복서죠. 한국체대 42년 복싱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부자가 선후배로 연결된 케이스죠. 아버지 성광배는 88년 세계군인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우승한 국내 정상급 복서였죠. 84년 전국체전에서 전북 대표 황동룡을 꺾으며 수준급 기량을 보였지만, 숙적 김광선에게 여러 차례 접전 끝에 고배를 마시면서 국가대표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성광배는 전국 무대에서 9차례나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접전 끝에 패하면서 준우승만 차지한 비운의 복서였죠.

아들 성동현은 서울체고 재학시절인 2007년 세계유소년복싱대회 밴텀급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하며 복싱계에 부전자전을 알렸고, 서울체고와 한국체대 시절엔 전국체전 5연패를 이룩한 아버지에 비해 손색없는 복서죠.

소속 선수를 이끌고 이번 대회에 출전한 광주 전일복싱체육관 임홍진 관장(47)은 96년 프로복싱 준신인왕 출신으로 다채로운 연타와 패기 넘친 파이팅으로 프로모터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지만,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은 최고로 인정받는 지도자 반열에 우뚝 섰죠. 그는 '정당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를 받아들이라'고 선수들에게 가르치며 지나친 승리 지상주의보다는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지도자죠. 이번 대회에서 임 관장의 제자 김응표가 경기에 패한 후 상대 선수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 펼쳐졌는데 임 관장도 두 복서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죠.

대부분의 지도자는 선수들에게 무조건 싸워서 이기라고 가르치면서 전쟁과 복싱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속삭이죠. 오래전 TV 광고에서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준우승자 크리스토퍼 하퍼를 등장시키면서 '스포츠에선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란 멘트를 날리던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겁니다. '너의 슬픔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풍토는 배제되고 경쟁과 성공이 나란히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 운운하지만, OECD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과 노인빈곤율, 최악의 행복지수 등이 우리 사회의 삭막한 경쟁구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반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