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펜싱을 그만둬야 하나 생각했었죠."
코카콜라 체육대상 2017년 7월 MVP로 선정된 '펜싱 그랜드슬래머' 구본길(28·국민체육진흥공단)이 영광의 순간, 지독한 슬럼프의 추억을 툭 털어놨다. 늘 환한 미소의 훈남 펜서가 처음으로 '그늘'을 이야기했다.
구본길은 '펜싱코리아'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이자 에이스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개인전, 단체전 2관왕에 올랐다. 2016년 리우올림픽 개인전 16강에서 탈락하며 아쉽게 메달을 놓쳤지만 구본길은 2017년 세계무대에서 보란듯이 부활했다.
지난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펜싱연맹(FIE) 세계선수권에서 남자 사브르 개인전, 단체전 모두 결승에 진출했다. 개인전 은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다. '그랜드슬램(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금)'의 위업과 함께 1년만에 세계랭킹 1위를 되찾았다.
▶슬럼프도 힘이 된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도 생각했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세계 랭킹은 6위로 떨어지고, 자신감도 함께 떨어졌다. 쉽게 포기하는 경기가 늘어났다. "리우올림픽 때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메달을 못 따도 실망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막상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1위에서 6위로 떨어진 게 사람들 보기엔 별 것아니지만 스스로에겐 큰 상처였다. 너무 아쉬웠다. 자신감이 자꾸 꺾였다."
바닥까지 몰린 챔피언은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세계선수권 금메달만 빼고 올림픽,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메달 다 땄는데 이제 다 내려놓자."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했을 때, 기적처럼 그랜드슬램이 찾아왔다. 세계선수권 금메달은 슬럼프를 이겨낸 구본길에게 온 '위로'이자 '선물'이었다.
지독한 슬럼프를 벗어난 비결은 '장점을 살리자'였다. "2년 전 내 공격적인 플레이스타일을 떠올렸다. 70~80% 공격으로 해결하는 스타일인데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수비적으로 변했다. 수비에서 20%를 실패해도 공격으로 만회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같다." 이후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1년만에 구본길은 세계랭킹 1위를 회복했다. "그랜드슬램, 랭킹 1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자신감이 올라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내가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좌절도 했었다. 이 슬럼프를 극복해내면서 이제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슬럼프도 지나고보니 감사하다. 만약에 극복을 못했다면 그냥 묻히는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세계랭킹 1위 선수는 매년 시즌 종료 후 국제펜싱연맹(FIE) 총회에 초청받는다. 구본길은 11월25일 총회 참석을 위해 출국한다. 생애 3번째 영예다. "2014년 세계랭킹 1위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2015년 1위 때는 '내가 난데…'하며 어깨가 올라갔었다"고 했다. 세번째는 달랐다. 지난해 지독한 슬럼프를 겪으며 그는 실력도, 마음도 성장했다. "그때 랭킹 1위보다 지금 랭킹 1위가 더욱 뜻깊고 감사하다. 그러나 예전처럼 랭킹이나, 세상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우쭐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내맘에 드는 펜싱으로 이 자리를 계속 오래 유지할까 생각하고 있다."
▶그랜드슬램에 이어 역사에 도전한다
1989년생 구본길은 21세 되던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개인-단체전 2관왕에 올랐다. 2018년 자카르타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딴다면, 남자선수 최초로 3연패의 위업을 이루게 된다. '최초' 타이틀 앞에서 구본길은 '팀 플레이'를 이야기했다. "내년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금메달보다 단체전 금메달이 우선 목표"라고 했다.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의 느낌을 모두가 함께 느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후배들이 그 느낌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그래야 한국 펜싱이 더 발전하고, 좋은 기운이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올림픽에서도 최초의 기록이 가능하다. 구본길은 2012년 생애 첫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남녀 펜서를 통틀어 올림픽 금메달 2개를 가진 이는 전무하다. 올림픽 2번째 금메달을 말하자 구본길은 신중해졌다. "2020년 도쿄올림픽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올림픽에 2번 나갔다. 어떤 대회인지 안다. 함부로 말할 대회가 아니다. 금메달은 간절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리우 때는 하느님이 메달을 주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을 만큼 준비가 안돼 있었다. 절대 거저 오는 게 아니다."
▶'펜싱코리아' '세계 최강' 사브르팀의 중심
금메달 펜싱 팀의 막내는 어느새 김정환(34·국민체육진흥공단)에 이어 '넘버2'가 됐다. 위와 아래를 조율하고 연결하는 사브르 팀의 허리이자 중심이 됐다. "광저우아시안게임, 런던올림픽 때는 막내였다. 멋모르고 형들만 믿고 갔다. 지금은 내가 흔들리면 안된다. 책임감이 커졌다"고 했다.
세계를 호령하는 '펜싱코리아' '세계 1위'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구본길은 국제대회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후원사 SK텔레콤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대표팀이 국제대회에 나갈 기회가 많아졌다. 경기력, 경험적인 부분도 크지만, 외국선수들과 친해지면서 괜한 긴장감, 부담감이 사라졌다. 실전도 연습하듯 편안하게 뛸 수 있다.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신감을 표했다.
'세계 최강' 사브르팀의 경쟁력은 완벽한 팀워크다. 런던 금메달부터 라이프치히 금메달까지 '세대교체' 과정은 성공적이었다. "원우영, 오은석 형이 런던 이후에도 현역으로 버텨주신 부분이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팀엔 든든한 (김)정환이형이 있다. 오상욱, 김준호 등 후배들은 실력이 뛰어나고, 선배들을 잘 따른다. 팀워크도, 분위기도 최고"라며 웃었다.
10년째 한솥밥을 먹고 있는 '6살차 형' 김정환을 향한 존경심은 확고했다. "정환이형이 하얀 눈위에 찍는 발자국을 따라가고 싶다. 지금껏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후배들도 우리의 발자국을 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환이형보다 더 오래하는 것이 목표다. 정환이형이 있어서 정말 좋다. 나도 관리만 잘하면 오래 선수로 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며 웃었다.
코카콜라 체육대상 2017년 7월 MVP로 선정된 '펜싱 그랜드슬래머' 구본길이 트로피를 든 채 예의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런던올림픽 금메달 후 코카콜라체육대상 단체상을 받을 때도 정말 기뻤다. 또다시 좋은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 스포츠조선이 제정하고 코카콜라가 후원하는 코카콜라 체육대상 월간 MVP에게는 트로피와 상금 100만원이 주어진다. 태릉=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