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죽은 권력일까, 살아있는 권력일까.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 추잡한 비리 스캔들이 자신의 턱밑까지 도달하자 사퇴 결정으로 자세를 낮췄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가깝다. 차기 FIFA 회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겸 FIFA 명예 부회장이 줄기차게 블래터 회장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18일(이하 한국시각) 미국 CNN이 공개한 인터뷰에서도 "블래터 회장은 바로 사퇴해야 한다. 유럽 의회도 두 달 전 즉시 사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FIFA는 긴급 총회나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당분간 업무를 돌볼 임시회장을 선출해야 한다"고 재차 주장했다. 정 회장은 이날 귀국한 자리에서도 "블래터 회장의 사임과 당분간 회장 업무를 맡을 대행체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블래터 회장은 물러날 뜻이 없다. 그는 차기 FIFA 회장 선거가 열리는 내년 2월 26일까지 '권좌'를 지킬 것이라고 했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다. 블래터 회장은 1981년부터 1998년까지 17년간 FIFA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어 1998년 축구 대권을 잡아 17년간 지구촌 축구를 좌지우지했다. 그의 영향력에 있는 국제 축구계 인사들이 절대 다수다. 몇몇 집행위원들은 여전히 블래터 회장을 지지하고 있다. 차기 회장 선거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블래터 회장이 서서히 목소리를 다시 내고 있다. FIFA 회장에 도전장을 낸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에 이어 정 회장에게도 '몽니'를 부리고 있다. 첫 타깃은 플라티니 회장이었다. 블래터 회장은 최근 네덜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플라티니와 나의 관계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이후 4년간 FIFA에서 내 밑에서 일했고, 2007년에는 내가 지원해서 UEFA 회장에 당선됐다. FIFA와 UEFA 위원을 함께 구성하기도 했다"며 "이유를 모르겠지만, 플라티니가 변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플라티니 회장은 실제로 블래터 회장과 막역했다. 그러나 현재는 등을 돌린 상황이다.
블래터 회장은 정 회장을 향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정 회장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FIFA를 부패한 조직이라고 언급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정 회장도 17년간 FIFA 부회장과 집행위원을 지냈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 회장이 자신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FIFA는 조직의 개선과 신뢰성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전날 "FIFA가 이토록 부패한 조직이 된 진짜 이유는 40년 동안 한 사람이 자기 측근들을 데리고 장기 집권을 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주장했다.
블래터 회장의 '충격'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블래터 회장의 말대로 정 회장은 1994년부터 2010년까지 FIFA 부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 기간 그는 FIFA의 개혁을 요구하며 철저하게 '반 블래터' 노선을 걸었다. '눈엣가시'였다. 2011년 1월 FIFA 부회장 5선 도전에 실패한 데는 블래터 회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막후에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 회장은 이날 "취리히에서 블래터 회장을 꼭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된다고 해 못 만났다. FIFA 사무국도 협조를 전혀 안 해줬다"고 불편해 했다. 또 향후 행보에 대해선 "축구는 당연히 유럽, FIFA회장은 당연히 유럽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능한 209개 FIFA 회원국을 모두 방문해 지지를 부탁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대가 열렸다. FIFA 회장 선거는 이미 불이 붙었다. 물밑에서의 암투도 극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