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일초 3학년 때 축구화를 신었다. 헌데 5학년이 되자 회의감이 들었다. 방학 때 신나게 뛰어노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축구가 하기 싫었다. 그러나 축구에서 벗어나려던 6학년 때 덕천중 감독의 권유로 축구화의 끈을 다시 묶게 됐다. 울산 현대의 수비수 정동호(24)에게 축구는 천직이었다.
부경고 시절에도 정동호의 주가는 상종가였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이차만 전 경남 감독은 "내가 지도한 선수 중 가장 공을 잘찬다"며 극찬했을 정도다. 정동호는 "굉장히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키는 것은 잘했던 것 같다"며 쑥스러워했다. 정동호는 신장(1m75)이 그리 크지 않지만, 빠른 스피드를 갖췄다. 특히 바르셀로나의 풀백 다니엘 알베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공격적인 스타일이다.
짧은 축구인생에 굴곡이 많았다. 고교 졸업 시기였던 2009년부터 첫 시련이 닥쳤다. 대학교 선택의 문제가 어린 선수를 해외로 내몰았다. 쓸쓸히 떠난 곳은 생소한 일본이었다.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정동호는 아픔을 딛고 빠르게 적응했다. 청소년대표팀에 자주 차출돼 소속팀 경기를 많이 뛰진 못했다. 그러나 소속팀에 돌아와서는 꾸준하게 주전멤버로 기용됐다. 깜짝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정동호는 "일본 선수가 다쳐 내가 첫 선발로 뛴 경기에서 팀이 5대0으로 승리했다. 이후부터 주전멤버가 됐다"고 회상했다. 외롭지 않았다. 의지할 한국인 동료도 있었다. 김근환(28·울산)이었다.
하지만 일본 생활 2년차 때부터 짙은 어둠이 깔렸다. 자신을 영입했던 감독이 바뀌면서 벤치멤버로 전락했다. 교체된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던 부분은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특히 김근환도 이적하고, 통역사도 없어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정동호는 "요코하마 훈련장에 시계가 걸려있는데 '운동이 언제 끝나나'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만 끝나면 집에만 가고 싶었다. 반우울증이 걸렸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해외로 눈을 돌린 선수들의 '눈물 젖은 빵'에 대한 얘기에도 공감했다. 그는 "지금도 많은 젊은 선수들이 해외로 나간다. 성공보다 실패 확률이 높다. 축구만 생각하면 안된다. 생활적인 면도 고려해야 한다. 애로사항이 많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부활의 돌파구는 임대였다. 2011년 일본 J2-리그 가이나레 돗토리로 둥지를 옮겼다. 몸 상태와 실전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임대를 마치고 돌아간 요코하마에는 정동호의 자리가 없었다. 또 다시 임대밖에 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항저우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컵대회를 포함 32경기를 뛰었다. 당시 니콜라 아넬카, 디디에 드로그바, 세이두 케이타, 무리퀴 등 톱클래스급 외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이들을 수비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았다"고 전했다.
운이 없었던 프로팀과 달리 연령별대표팀에선 승승장구했다. 홍명보 감독의 '숨은 황태자'였다. 2009년 20세 이하 이집트 청소년월드컵 때도 부상을 한 오재석을 대신해 16강과 8강전을 모두 소화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도 뛰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마지막 소집 때 부상을 했다. 그는 "내가 부족했다. 마지막 기회였는데 못잡아 아쉽다"고 말했다.
올시즌 울산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K-리그 클래식도 만만치 않은 무대였다. 부동의 우측 풀백 이 용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9경기 출전, 1도움이 전부다. 초라한 성적이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졌다. 그는 "아쉬움이 있다. 초반에 몸이 안좋아 동계훈련을 많이 쉬었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몸 관리에 대해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후반기 꾸준히 기회를 잡고 있다. 그는 "조금씩 몸이 좋아지고 있는 상태다. 후반기 들어서 만족하지 못하지만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직 제대로 꽃을 피어보지도 못했다. 롤러코스터는 탈만큼 탔다. 내년이 더 기대된다. 정동호의 축구인생은 만개를 준비하고 있다.
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