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공포였다. '27년 박힌 돌' 알렉스 퍼거슨이 쌓아 올린 위업은 '막 굴러온 돌' 데이비드 모예스에 의해 처참히 파괴됐다. 시즌 초반부터 곤두박질친 맨체스터 유타이티드(맨유)의 최종 순위는 7위. 유로파리그 진출권마저 놓친 신임 감독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시커멓게 태워버렸고, 결국 루이스 판 할이 긴급 투입돼 화재 진압에 나섰다.
'네덜란드에서 온 그대'는 달랐다. 고국을 브라질월드컵 3위에 올려놓은 판 할은 맨유를 깜짝 변신시켰다. 병든 닭처럼 힘을 쓰지 못했던 팀은 AS로마-인터밀란-레알마드리드-리버풀을 연이어 상대한 2014 기네스 인터내셔널 챔피언스컵에서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4-2-3-1(4-4-2)을 메인 시스템으로 고집해온 팀에 새 옷 '쓰리백'을 입혔고, 직접 뛴 선수들이 전술 변화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을 만큼 결과가 좋았다.
판 할의 맨유는 성공할 수 있을까. 기준치를 어디에 맞추냐에 따라 답이 갈릴 질문이지만, 확실한 건 무작정 장밋빛 미래만을 노래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점이다. 프리시즌 친선 대회와 정식 리그는 엄연히 다르고, 판 할 역시도 우승 직후 "가장 중요한 게임은 스완지와의 개막전"이라며 말을 아꼈다. 8월부터 내년 5월까지, 9개월간의 대장정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 요소를 얼마나 잘 이겨내느냐가 관건. 맨유를 흔들 수 있는 포인트를 몇 가지 짚어본다.
▲ 왜 후방 잉여 자원을 줄여야만 하는가
맨유가 기네스컵에서 뽑아낸 득점은 총 9골. 인테르전 무득점만 빼고선 매 경기 3골씩을 퍼부었지만, 내용상의 화끈함은 골 수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똑같이 3골을 넣는 경기라도 필드 플레이어의 배치에 따라 구체적인 분위기는 변하기 마련이다. 이는 후방에서 볼 소유권을 쥐고 난 뒤에야 공격을 전개했던 맨유의 형태와도 연관을 갖는다. 공격의 시작점이 낮았다는 것은 상대를 몰아칠 장면이 그만큼 줄었음을 의미한다. 맞대결한 팀 면면을 따졌을 때 쉬운 일은 아니었겠으나, 약간의 위치 수정에 따라 '더 잘 할 수도 있었다'는 시각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방엔 잉여 자원이 넘쳐났다. 상대의 측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5백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큰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도 중앙 미드필더까지 내려 앉아 7인 체제의 수비 전형을 꾸렸다. 그뿐 아니라 골킥을 처리할 때도 쓰리백 세 명이 모두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짧은 패스를 기다렸다. 수비 숫자가 지나치게 많은 형태로는 중앙선을 넘는 작업에 필요 이상의 힘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상대가 질 높은 전방 압박이라도 가한다면 그 길은 더 험난해진다. 무게 중심이 아래로 쳐지다 보니 전진 패스에 대한 세컨볼 싸움도 만족스러울 리 없고, 자연스레 공격으로 전환하는 템포도 꺾인다.
상대가 정통 투톱을 내세우지 않는 이상, 쓰리백 전원이 내려앉는 건 '수비 안정'보다는 '자원 낭비'에 가깝다. 해결 방법 중 하나는 포어 리베로를 활용하는 것. 직접적인 수비 태세를 취할 때가 아니라면 쓰리백의 중앙에 둔 자원을 두 명의 미드필더 아래로 바짝 전진시키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윗선에서 볼 소유권을 훔치는 만큼 수비적으로 위험할 우려가 줄고, 공격으로 빠르게 전환하는 메리트까지 얻게 된다. 또, 수비 진영에서 전진 패스를 시작하기에도 한결 수월하다. 맨유가 과연 이에 걸맞은 유능한 자원을 갖추고 있느냐는 지켜볼 일이지만, 발암 경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면 수비수가 남아도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뒤로 처진 형태는 가벼이 넘길 부분이 아니다. 볼을 올려보낸 직후, 상대 수비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맨유가 쥔 루트는 '투톱+공격형 미드필더'로 극히 한정됐다. 볼 줄 곳을 찾아 헤매는 동안 개인의 볼 소유 시간은 늘어나고, 원활한 패스 진행을 위한 삼각 대형을 만드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직접 드리블을 치기도 하지만 '공보다 빠른 사람은 없다'는 진리에 좌절하기 일쑤다. 루니가 페널티박스로부터 먼 곳에서 볼을 받으려 하고, 과감하면서도 무리한 중거리 슈팅을 늘려간 것도 이 때문. 에쉴리영이 윙백으로서의 가치를 빛내기에도 그리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는 지난 월드컵에 나선 네덜란드와도 상당 부분 닮았다. 판 할 감독은 라인을 내린 상황에서 상대 공격을 맞받아친 역습으로 재미를 많이 봤다. 스페인전처럼 정면 승부에 나선 상대가 흔들린 시점을 놓치지 않았고, 로벤을 이용해 뒷공간을 부숴버렸다. 반면 상대가 수비에 주안점을 둘 때에는 지루한 공방을 피하지 못했다. 16강 멕시코전에서 탈락 위기에 놓였던 것도 같은 맥락. 이처럼 앞선 공격진의 개인 능력에 의존해야 하는 경기는 늘 위험 부담이 따른다. 더욱이 루니, 반페르시, 웰백이 로벤과 같은 빠른 드리블러 타입도 아닐뿐더러 이 중 누구 하나만 앓아누워도 큰 문제다.?
빠르게 진입하는 데 실패한 맨유는 익숙한 루트를 택한다(본래 속공을 주 무기로 삼는 팀은 아니었어도, 득점 장면에서는 빠른 템포를 잘 살렸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상대 수비 블록에 갇히자, 측면으로 크게 벌려 느지막이 올라온 윙백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 선택이 곧 맨유를 옭아맬 덫이 될 수 있다. 최하위권은 몰라도, 수비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중위권 이상의 팀이라면 꼬일 가능성이 농후한 단조로운 패턴이다. 좌우 전환의 속도를 높여 상대 균형을 무너뜨릴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볼을 횡으로 돌리면서도 종적으로 들어갈 틈을 만들어내는 준비가 필수다. 지난 시즌 풀럼전에서 나온 '크로스 81개'의 공포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 8월 말까지 내보낼 자원은 얼마나 될까
쓰리백을 플랜 A로 활용하는 파급은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가 하나만 필요한 3-4-1-2라면, 그리고 윙백 홀로 측면을 떠안는 3-4-1-2라면 기존의 구성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판 할 감독이 북미 투어 중 언급한 '살생부'는 기량의 문제뿐 아니라, 포지션별 쓰임새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이를테면 4-2-3-1 중 원톱 아래 2선에서 중앙, 측면을 가리지 않았던 '10번(플레이메이커)'의 입지가 3-4-1-2에서는 요동칠 수 있다(판 할은 카가와 신지의 이적설에 대해 부인했지만, 이적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니다).
윙어는 더 하다. ?좌우 측면에 각각 배치된 두 명의 자원 중 하나는 필요 없게 됐다. 기존의 측면 수비에 윙어 자원까지 경쟁에 놓이게 된 것. 에쉴리영, 나니 등 일부는 최전방 투톱 자리에서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단, 측면에서만 잘 뛰는 윙어가 있는가 하면 측면은 물론 중앙에서도 잘 뛰는 윙어가 있는데, 맨유가 보유한 자원은 대부분 후자에 해당한다. 공간을 보고 달리던 이들이 상대 중앙 수비 앞에서는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갖느냐가 생사를 가를 것이다. 더불어 윙백으로 변신한 몇몇 선수도 더 살펴봐야 한다. 수비력은 물론, 공-수를 겸할 활동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플랜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
첫발은 분명 성공적으로 내딛었지만, 정확한 평가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연례행사보다도 뜸하게 활용했던 '쓰리백'을 덜컥 소화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횡으로 늘어선 세 명의 수비진이 서로 간의 거리 조절에 실패해 패스 미스를 범한 장면처럼 보완할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모예스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시선이 대부분일 터. 판 할의 심폐소생술로 정상 호흡을 찾기 시작한 맨유는 어디까지 올라설 수 있을까.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