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농사일보다 훨씬 쉬워요."
넥센 히어로즈 '홈런타자' 이성열(29). 이제 홈런타자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8일 현재 8개의 홈런을 때려 박병호 최 정(이상 9개)에 이어 이 부문 공동 2위다. 순천북초-이수중-순천효천고를 거쳐 2003년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3순위로 LG 트위스에 입단한 이성열은 오랫동안 유망주의 자리에 머물렀다. 두산 베어스 소속이던 2010년 24개의 홈런을 때린 것 외에는 별다른 성적이 없다. LG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그는 두산으로 트레이드가 됐고, 지난해 7월 다시 히어로즈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1984년 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 어느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했지만, 그의 올시즌 페이스를 보면, 서른살 이성열의 2013년은 '잔치 시작'이다. 이택근-박병호-강정호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의 뒤를 받치는 게 6번 타자 이성열의 역할. 창단 6년 만에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우승까지 노리고 있는 히어로즈 타선의 핵이다.
1m85, 95㎏의 당당한 체구에 좀처럼 웃지 않는 투박한 인상. 주위 사람들은 얼핏 봐도 시골출신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성열은 프로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부모님이 벼농사를 짓고, 채소를 재배하고, 소를 사육한다. 어릴 때는 소 20여마리를 키웠는데, 아버지가 연세가 들면서 조금씩 줄였다고 한다.
이성열은 시즌이 끝나면 2주일 정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돕는다. "시즌이 종료할 때 쯤 되면 시골은 농번기잖아요. 시즌이 끝나면 보름 정도 구단에서 휴가를 주는데,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옷을 챙겨서 고향으로 출발해요. 농사일이라는 게 어머니가 할 수 없는 게 많아요. 아버지를 거들어 드리면 수월하게 일을 마칠 수 있잖아요. 1년 동안 못 했던 애틋한 이야기도 하고요"라고 했다.
힘이 장사인 이성열도 농사일보다 야구가 훨씬 쉬운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시골에 갈 때마다 안일해진 생각을 다시 다잡게 되더라고요.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게 야구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허술하게 야구를 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돌아와요"라고 했다.
이성열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후배인 투수 문성현이 쓰던 등번호 36번으로 바꿨다. LG 입단 때 빈 번호라서 별 생각없이 선택했던 배번이다. 같은 좌타자에 같은 등번호, 같은 영어 이름 이니셜(LEE S Y).이게 눈에 띄었는지 선배 이승엽이 먼저 아는 체를 해주면서 애착이 생겼단다. LG에서 두산으로 이적한 직후에도 어쩔 수 없이 잠시 45번을 쓰다가 36번으로 바꿨던 이성열이다. 지난해 히어로즈로 이적한 후 잠깐 36번과 이별을 했다가 다시 되찾았다.
2004년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히로시마 카프의 시마 시게노부(현재 세이부 소속) 열풍이 몰아쳤다. 1994년 입단해 10년 가까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시마가 홈런을 펑펑 터트리자, 일본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시마의 이름 앞에 '아카(赤) 고질라'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시마의 등번호 55번은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요미우리를 거쳐 당시 뉴욕 양키스 소속)를 상징하는 번호였다. 두 선수 모두 좌타자에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카는 일본어로 붉은 색을 의미하는데, 시마의 소속팀 히로시마의 팀 컬러다. 2004년 시마는 3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언젠가 이성열의 홈런을 보면서 이승엽을 떠올릴 수 있을까.
-잘 지내고 있지? 내 공은 절대 치면 안 된다. 갑자기 너무 잘 치는데 비결이 뭐야? 홈런왕 욕심은 없는거냐.(LG 우규민, 한화 김태균, 삼성 조동찬, 롯데 김대우, 두산 최준석)
▶꾸준히 나가는 게 큰 것 같고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신다. 경기를 하는 세시간 동안 야구 말고 딴 생각을 안 하려고 해. 스프링캠프 때 허문회 타격코치가 '너는 충분히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끊임없이 해주셨는데, 자신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느 것 같아. 요즘 경기가 끝나면 그날 게임을 되돌아보면서 메모를 하고 있다. 메모 맨 아래에서 꼭 '긍정의 힘을 믿자'고 적어둔다. 경기는 전쟁이잖아. 상대를 이겨야 살아남는거니까 너랑도 실력으로 승부를 하고 싶다. 니가 요즘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홈런을 의식하면 분명히 안 좋은 버릇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해. 올해 첫 번째 목표는 전 경기 출전이다. 경기에 많이 나가봐야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잖아. (우규민은 이성열, 이대형과 함께 2003년 LG에 입단한 동기생이다. 이성열은 2010년 133경기 중 129경기에 출전해 24홈런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프로 최고 기록이다)
-형의 힘이 너무 부러워요.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죠.(넥센 강정호)
▶힘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아. 아버지(이윤근씨)가 올해 57세이신데, 키는 1m72로 큰 편은 아니지만 몸이 단단하거든. 나랑 똑같은 왼손잡이고. 또 운동을 굉장이 좋아하시지. 3년 전에 팔씨름을 했는데 내가 졌다니까. 시골에서 자랄 때 부모님이 좋은 음식을 잘 챙겨주셨어.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했을 정도로 부모님이 직접 음식을 마련해 주셨어. 나도 사서 먹는 음식보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좋아 했다.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시고 좋은 음식을 챙겨주신 부모님에게 감사드려야지.(이성열은 순천북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다. 그는 9월 27일에 야구를 시작했다며,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보면 예전에 비해 스윙이 굉장히 자신있어 보인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냐.(LG 이동현)
▶출발이 좋아서 그런지 여유가 생겼어요.(이성열은 3월 30일 KIA와의 개막전에서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했고, 개막전부터 5경기에서 4개의 홈런을 때렸다) 초반에 홈런이 안 나왔다면 조금 힘들었을텐데,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어요. 형도 안 아프고 원하는 걸 잘 했으면 좋겠어요. 자주 연락 못 드려 죄송해요.
-형 홈런 칠 때마다 감사의 의미로 감독님 가슴을 살짝 미는 세리머니를 하는데,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을 때 그렇게 하면 조금 민망하지 않아요.(넥센 박병호)
▶경기를 하다보면 질 수도 있고, 승패가 갈라지는 게 스포츠 아니냐. 홈런을 때릴 때마다 기회를 주신 감독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트레이드 해온 선수에게 바로 기회를 준 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 보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인데, 승패랑은 상관이 없지. 문제가 안 된다고 봐. 그렇다고 포옹을 할수는 없잖아.(웃음) 그런데 지난 주 대구 삼성전에서 7호 홈런을 때리고 기분이 너무 좋아 세리머니를 잊어버렸다. 이게 마음에 걸려.(이성열은 7일 잠실 LG전에서 8호 홈런을 터트린 후 염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가슴을 살짝 미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7번째 홈런 때 세리머니를 건너뛰어 두 번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쑥스럽더란다)
-타격 후 달릴 때 표정이 도깨비처럼 너무 무서워요. 꼭 그렇게 인상을 쓰고 뛰어야 하나요. 인상 안 쓰고 달릴 수는 없는 건가요.(LG 정의윤)
▶주위에서 그 이야기 자주 듣는다. 내가 평소에 웃는 인상도 아니고, 야구장에서는 되도록 안 웃으려고 한다. 야구장은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방심하는 순간 다른 선수가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잖아. 늘 방심하면 끝이라는 생각을 해. 나중에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 충분히 웃을 수 있잖아.
-내가 본 프로야구 선수 중 악력이 가장 센 선수가 둘이 있는데, 박병호와 너다. 병호는 어릴 때부터 프로틴(단백질)을 꾸준히 먹었다는데, 엄청난 악력의 비밀이라도 있냐.(SK 조인성)
▶시골에서 살다보면 사실 별로 할 게 없어요. 심심할 때마다 완력기를 갖고 놀았어요. 혼자서 철봉에 매달려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나 시험해보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학교에 웨이트트레이닝 시설이 없어 한가할 때면 늘 아령을 들고 살았어요. 야구는 전체적으로 몸이 좋아야 잘 할 수 있는데, 특히 손목힘이 좋아야 좋은 공을 이겨낼 수 있잖아요. 제 홈런 비거리가 다른 선수보다 길어요. 내가 때린 타구가 생각보다 많이 나간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어요. 손목힘 덕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간결한 스윙을 해도 될 것 같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예전에 나한테 포수 캐치 요령을 배우고 그랬는데, 다시 포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삼성 최형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포수는 전혀 생각이 없어요. 요즘 우익수나 지명타자로 나서고 있는데, 거기에 맞게 몸이 만들어졌어요. 경기가 연장까지 가서 포수가 없을 때라면 모를까. (이)택근이 형이나 (강)정호도 포수를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최근까지 포수를 한 내가 조금 나을 테니까요.(이성열은 두산 소속이던 2011년 KIA전 연장전 때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포수가 없어 마스크를 쓴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형, 방망이를 좀 달라고 해도 왜 안 주는 거죠. 배트 얻으러 가면 꼭 쓰던 걸 안 주고 다른 배트를 주던데. 나도 잘 치는 타자 방망이를 얻어 쓰고 싶다고요. 다음에 가면 두 자루 줘야해요.(전주고 출신인 최형우는 이성열보다 한해 위다.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순천효천고와 전주고가 자주 연습경기를 해 고교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성열과 최형우 모두 포수를 봤다)
-내가 너한테 홈런 맞고 2군 내려갔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도대체 내 공 중에 어떤 게 치기 좋고, 어떤 게 치기 어려운지 말해주라. 나는 좀 절박하다. 쪽지라도 줘라.(SK 임경완)
▶지난해 8월 26일 제가 형한테 홈런을 쳤지요. 넥센 이적후 첫 홈런이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8회 1-1 상황에서 투수를 교체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이 계속 던지더라고요. 사실 전 타석에서 실수를 해 화가난 상태였어요. 초구를 때렸는데 순간 잘 맞았다고 생각했어요. 공이 좌측 폴대쪽으로 날아가 파울만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홈런이 됐어요. 그런데 다음날 보니까 형이 안 계시더라고요. 형한테는 미안했지만 이 홈런을 때린 후 조금 경기를 편하게 할 수 있었어요.(이성열의 이 홈런으로 히어로즈는 3대1로 이겼다) 형이 던지는 공 중에서 쉬운 공은 정말 없어요. 볼배합도 까다롭고요. 예전에 사직구장에서 형한테 홈런을 빼앗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형이랑 상대할 때는 조금 편한 느낌은 있어요.
-패션감각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농촌패션에서 벗어나 도시남자가 될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롯데 김대우)
▶머리 스타일 때문에 그런가. 시골사람이지만 도시사람과 비슷해지려고 노력은 한다. 솔직히 야구만큼 옷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러는 넌 얼마나 잘 입는 지 한 번 지켜보겠다.(이성열은 김대우와 한 번도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없지만 동기생으로 경기장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다)
-타석에서 아무 생각없이 막 휘두르는 것 처럼 보인다.(웃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롯데 김승회)
▶투수 공을 잘 보고, 잘 치려고 노력해요. 공격적으로 하려고요. 지난 번에 형을 상대로 안타를 때렸는데, 경기가 최소됐었지요. 타석에서는 상대 투수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어요. 전쟁터에 나왔는데 약하게 비쳐지는 게 싫더라고요.
-두산 시절에 몸이 그렇게 좋은데도 보약을 항상 잘 챙겨먹더라. 넥센으로 옮긴 다음에 특별히 추가된 보약은 없냐.(두산 손시헌)
▶한약을 주로 먹었는데 요즘에는 비타민도 챙겨먹고 있어요. 이제 저도 서른이잖아요. 잘 먹고 잘 쉬면서 몸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아요. 그런데 형은 형수님이 잘 챙겨주시죠?
-LG, 두산을 거쳐 넥센으로 이적했는데, 이 세 팀의 분위기가 어떻게 다르던가요.(KIA 홍재호)
▶사실 LG 때는 감독님과 코치님이 자주 바귀어 조금 힘들었다. 두산으로 이적했을 때는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고. 2010년 김경문 감독님이 기회를 주셔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직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LG에서 5년, 두산에서 5년을 보냈는데, LG 시절 5년 동안 인생을 배운 것 같고, 두산에서는 절실하게 야구를 배운 것 같아. LG는 성적이 안 나 다들 힘들어 했어. 두산에서는 이기는 야구를 배운 것 같아. 나도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넥센은 어린 친구들이 많아. 함께 배우는 분위기에서 야구를 하고 있다.
-형은 외모와 다르게 음식도 상당히 가린다고 들었는데요. 인스턴트 음식이나 냉동 식품은 전혀 안 드시는 거가요.(넥센 서건창)
▶콜라, 사이다같은 음료수는 안 먹으려고 노력한다. 햄버거와 피자, 스파게티 같은 밀가루 음식도 피하려고 해. 밥 한끼를 먹더라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너도 숙소생활을 하고 있으니 잘 먹어라. 연봉도 많이 올랐으니 잘 챙겨먹어야 한다.
-너 여자친구 있는 걸로 아는데, 결혼은 언제쯤 할거냐.(넥센 조중근)
▶형이 가면 저도 따라 갈게요.(웃음)
-왼쪽 타석에서 칠 만큼 친 것 같은데, 왼손 투수가 나올 때 오른쪽 타석에서 쳐볼 생각은 없냐.(한화 최승환)
▶(순간 당황하는 얼굴로)저는 두 가지 일을 잘 못해요. 두 가지는 힘들어요. 왼손투수를 상대로 왼쪽타석에서 충분히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이성열은 좌타자이지만 한때 스위치 타자로 오른쪽 타석에 들어간 적도 있다. 류현진이 신인일 때 오른쪽 타석에서 우전안타를 때린 적이 있었다. 송진우를 상대로 홈런을 때린 적도 있는데, 오른쪽 타석에서 때린 유일한 홈런이었다. 올시즌 홈런 8개 중 3개를 왼손 투수를 상대로 때렸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