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꼭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여러분을 만나겠습니다."
바람이 떠나간 자리에는 눈물만 남았다.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KIA의 '정신적 지주' 이종범은 이제 '선수'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이종범이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선수생활을 회고하고 은퇴의 심경을 밝혔다. 이종범은 5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 15층 로즈홀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종범은 "이제 더 이상 내 이름 뒤로 '선수'라는 단어를 붙이지 못하게 됐음을 알립니다"고 말문을 연 뒤 "그동안 정말 분에 넘치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팬과 선·후배,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며 차분히 준비해 온 은퇴사를 읽어나갔다.
▶후회는 없다. 나는 행복한 야구선수였다
1993년 KIA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데뷔한 지 20년. 이종범은 '타이거즈의 영광과 좌절'을 모두 맛보며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입단 첫 해부터 '슈퍼스타'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최다안타 2위와 득점 1위, 도루 2위로 화려한 정규시즌을 마친 후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됐다.
이종범은 "타이거즈에 들어오기 위해 야구를 했던 시절이 있었고, 해태 유니폼을 입고 나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동안 꿈꿔왔던대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수 있게 돼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규시즌 개막을 1주일여 앞둔 시점에 나온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에 놀라는 팬들이 많았다. 이종범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2008년 시즌 후 처음 은퇴 권유를 받은 이후 하루도 '은퇴'라는 단어를 잊고 산 적은 없었습니다.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은퇴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팀에 도움이 될수 있다면 어느 것이든 하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번 은퇴결정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팀을 위해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이종범은 "은퇴는 어디까지나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괜한 오해로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이 자리에도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은퇴와 관련한 오해를 불식시켰다.
▶가족은 나의 힘, '아버지의 이름'으로 힘을 내겠다
이어진 질의응답을 통해 이종범은 앞으로의 계획과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밝혔다. 이종범은 "현재로서는 뚜렷한 계획은 없습니다. 오늘로 선수생활을 은퇴하는 데 이 순간부터 어떤 일을 할 지는 스스로 잘 생각해보고, 또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해야 한국프로야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후배와 팬들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고 밝혔다.
이종범은 계속해서 "초등학교 3학년인 1979년 3월부터 야구를 해서 33~34년째 야구만 했는데, 뭘 하겠습니까.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고, 사업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앞으로도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종범은 "오늘도 많은 기자분들이 찾아주셨는데, 회견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할리우드 스타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야구를 해 온 덕분에 이런 관심을 받는 것 같습니다"며 환하게 웃었다.
한동안 기쁘고 슬펐던 추억과 앞으로의 계획을 진지하게 밝히던 이종범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밝히는 순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종범은 "가족이야말로 내게 큰 힘을 줬습니다. 아내와 큰 아들 정후(14), 딸 가연(13)이까지…"라고 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티슈로 눈물을 닦아낸 이종범은 "다치고 슬럼프를 겪었을 때 가족이 없었다면 힘이 안됐을 겁니다. 사랑스러운 집사람과 아들, 딸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행복한 선수였다고 생각힙니다. 고맙고 큰 사랑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종범은 KIA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내가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던 것은 주위의 평범한 아버지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통해 힘을 얻었고, 나도 희망을 드리고 싶어 열심히 했습니다"라며 "아버지들의 기운을 모아 꼭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여러분을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며 '타이거즈의 이종범'으로 다시 서겠다고 다짐했다.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