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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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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풋풋한 첫사랑, 그 첫사랑의 갑작스러운 죽음, 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 기억상실증에 걸린 첫사랑의 귀환, 그가 첫사랑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하게 되는 주인공, 잃어버린 기억을 감추느라 급급한 주변 사람들…. 지금까지 '해품달'의 로맨스는 대략 이렇게 흘러왔다. '해품달'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기억상실 코드의 대표 드라마 '겨울연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청자 게시판이나 SNS에는 "겨울연가의 고전판을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판 겨울연가"라는 시청자들의 얘기가 종종 올라온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준상(배용준)에서 연우(한가인)로 성별만 바뀌었을 뿐이란 거다.
'해품달'의 젊은 왕 이훤(김수현)은 첫사랑인 세자빈 연우를 잊지 못하면서도 연우와 닮은 무녀 월(한가인)을 마음에 품는다. 연우라 불리던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월도 훤을 향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다. '겨울연가'에서도 그랬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민형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던 준상(배용준)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유진(최지우)을 사랑하고, 유진도 그가 첫사랑 준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해품달'의 양명(정일우)과 '겨울연가'의 상혁(박용하)처럼 사랑받지 못한 채 뒷모습만 바라보는 캐릭터도 나온다. 이들의 사랑 또한 절박하지만 결국엔 두 남녀의 사랑에 기여한다는 것도 같다. 운명같은 첫사랑 판타지는 이렇게 완성된다.
심지어 잠행을 나간 훤이 상선내관 형선(정은표)을 따돌리기 위해 눈사람을 만들어오라 하명한 것을 보고, '겨울연가'의 그 유명한 '눈사람'을 떠올렸다는 얘기도 보인다. '겨울연가'의 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가 '해품달'의 제작사이기도 하니, 이쯤 되면 '평행이론'이 성립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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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멜로물이었다면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만큼 진부하고 상투적이라 비판받았을 '첫사랑'과 '기억상실'이란 코드가 '해품달'에서는 오랜만에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머릿말에 내세운 것처럼 무속 판타지가 결합됐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무녀가 흑주술로 사람을 죽였다가 살리고 두 남녀가 다시 만나 제자리를 찾는 것은 천지신명의 뜻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현대가 배경이었다면 '접신' 설정이 나왔던 '신기생뎐'처럼 막장 논란에 휩싸였겠지만, '해품달'에선 운명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사실 정은궐 작가의 원작소설에선 여주인공이 훤을 위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감추었을 뿐 기억상실증에 걸리진 않는다. 드라마가 원작에 없던 멜로의 필수요소들을 극 안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변용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멜로물의 단골소재들은 '해품달'의 로맨스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품달'은 사극이라는 그릇에 담겼을 뿐 현대의 정통 멜로 드라마에 더 가깝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해품달'이 '겨울연가'처럼 남녀노소의 고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이기도 하다.
한 방송 관계자는 "현대극의 멜로는 시청자들이 그 틀을 알기 때문에 식상하게 느낀다. 하지만 사극의 멜로에는 계급의 문제가 끼어들기 때문에 훨씬 드라마틱하다"며 "'해품달'을 비롯해 최근의 로맨스 사극들은 정통 멜로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새삼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