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13)
기사입력 2000년 02월 09일 14시 16분
비서에게 녹차를 가져오라고 시킨 백주현 사장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8시 30분이었다.
오늘은 전경련의 친한 사장단 몇명과 아침부터 골프 약속이 있었지만 취소하고 회사에 나온 것이다. 세상없어도 골프 약속은 지켜온 백주현이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백주현은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눌렀다.
"예, 사장님."
역시 긴장하고 있는 듯 기획실장 백경일의 목소리도 굳어 있었다.
"준비는 다 해놓았지?"
"예. 서류도 모두 복사해 놓았습니다."
"그럼 9시 정각에 6부장하고 이대진이를 내 방으로 불러. 그리고 관리상무도 참석시켜야겠지?"
"예. 그래서 대충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관리상무는 임직원의 인사를 맡은 중역이다. 백주현은 그 자리에서 이대진의 거취를 결정해 버릴 작정이었다.
증거가 나온 것만 해도 미화 15만 달러를 부하들을 시켜 환전한 것이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파면과 함께 형사고발을 하든지 아니면 아예 사기와 횡령혐의를 씌워 처음부터 경찰에 넘기든지 둘중의 하나를 택하기로 백경일과 합의가 되었다.
백주현의 분위기를 눈치챈 비서가 조심스럽게 녹차잔을 내려놓고 방을 나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흰색의 직통전화로, 몇명만이 번호를 알고있는 전화였다.
아마 오늘 골프 약속을 펑크 낸 것에 대한 사장들의 전화라고 생각한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예. 백주현이요."
"백사장님, 난 국정원의 대공실장 오대규라고 합니다."
백주현이 퍼뜩 눈을 치켜뜨고는 전화기를 고쳐쥐었다. 난데없는 전화였고 오대규라는 인물과는 처음이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할 때에 `저'라고 하는 것과 `나'라고 부를 때의 차이는 크다.
백주현은 헛기침을 했다. 화도 났고 당황했기 때문인데 그 비율은 반반이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국정원의 담당 국장이 5분 후에 사장님을 방문할 것입니다.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해서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만나보면 아실 일이고, 이야기 끝나시면 나한테 연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백주현은 어금니를 물었다. 이 작자는 또 나라고 자신을 표현하면서 이젠 위압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이제 불안감이 7할이었고 화가 난 비율은 3할로 줄어들었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지요."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인터폰이 울리더니 여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국정원에서 약속을 하셨다고 합니다만."
"알았어. 모셔."
어깨를 부풀려 세운 백주현의 뇌세포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얼른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초조해졌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의 안내로 두 사내가 들어섰을 때 백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두 작자 모두 초면이었는데 의외로 인상들이 좋았다. 앞장선 40대쯤의 사내가 웃음띤 얼굴로 백주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저희 실장님 연락 받으셨지요?"
"예. 그런데 원체 갑작스러운 일이라."
"뭐 잠깐이면 됩니다. 저희 만나시고 바로 한성 골프장으로 가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백주현이 눈을 꿈벅이며 사내를 보았다. 오늘 골프 회동을 알고있는 것이다. 소파에 앉았을 때 사내가 명함을 내밀었다.
"전 대공실 소속의 제1국장 김재선이라고 합니다. 극동전자와는 인연이 많지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