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11)

기사입력 2000년 02월 07일 14시 22분


6부장 조재철은 팀장이었을 때부터 백경일의 심복이었다. 그래서 부장이 되고나서는 기획실장실에 더 자주 들락거렸는데,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불려왔다. 백경일은 어젯밤에 과음했는지 눈에 밴 취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앞에 앉은 조재철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이대진의 꼬리를 잡았어. 그 놈이 팀원들을 시켜서 달러를 환전한 증거가 여기 있어."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턱으로 가리켰다.

"읽어봐."

서류를 집어든 조재철이 읽는 동안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서류를 내려놓은 조재철이 눈을 크게 뜨고는 백경일을 보았다.

"오성호와 정현희, 김영만이 각각 5만달러씩 15만달러를 환전했군요."

"그래. 하지만 다른 놈들도 환전했을 거야. 소액으로 쪼개서 했기 때문에 자료에는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무슨 돈일까요?"

"콜롬비아에서 물품 대금으로 받은 거지."

이대진이 콜롬비아에서 돌아온 사흘 후에 환전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조재철이 긴장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200만달러가 넘는 거액인 것이다. 회사에는 받지 못했다고 해놓고 몽땅 횡령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장님.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재철이 조심스럽게 묻자 백경일이 잇사이로 말했다.

"내가 추궁을 하면 그놈이 자백할 것 같나?"

"아니라고 잡아떼겠지요. 더구나 콜롬비아의 바이어는 살해됐으니 확인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사장님은 파면을 시키든지 경찰에 고발을 하라고 하셔. 무슨 핑계를 대든지 그 돈은 횡령한 돈일테니 말이야."

"환전해서 어디다 썼을까요?"

그러자 백경일이 힐끗 조재철을 보았다.

"죽은 박명기의 가족에게 준 모양이야. 10억원 가까운 돈이 그쪽으로 건너갔다는 증거가 있어."

눈을 치켜뜬 백경일이 말을 이었다.

"더러운 놈. 횡령한 돈으로 생색을 냈어. 놈은 회사를 깔아뭉개고 제 위상만 높이고 있단 말이야."

"인사조치를 하시더라도 한번은 해명을 들어보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백경일의 강한 시선을 받은 조재철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물론 이대진은 입이 열 개라도 대답을 못하겠지만 말씀입니다. 회사에서 이 일을 비밀리에 처리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해."

머리를 끄덕인 백경일이 결심한 듯 말했다.

"내일 아침에 사장실에서 이대진의 핑계를 듣기로 하지. 그때 자네도 참석하도록."

"알겠습니다."

기획실장실을 나온 조재철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조재철은 회사에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한정식집에서 이대진과 마주앉았다. 그가 이대진을 불러낸 것이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이대진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조재철을 보았다.

"조선배. 무슨 비밀 이야기가 있는 거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나오라니 말입니다."

"넌 파면감이야."

뱉듯이 말한 조재철이 이대진을 노려보았다.

"임마. 달러를 바꾸려면 남대문 암달러상한테 가져가든지 해야지. 은행에서 바꾸는 미련한 놈들이 어디 있어? 병신같은 놈들."

조재철이 주먹으로 가볍게 밥상을 쳤다.

"넌 내일 아침에 사장실에서 재판을 받게 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