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8)

기사입력 2000년 02월 02일 13시 28분


아주국장 문형호가 위자영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문국장, 극동전자에서 일본으로 KPS형 무전기 5만개를 수출할 예정이오."

위자영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신용장은 일본에서 오픈시켜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처럼 꾸몄지만 최종 도착지는 타이페이란 말이오. 일본은 경유지일 뿐이오."

"그렇습니까?"

불끈 화가 치밀어오른 문형호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극동전자의 사장은 사과까지 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위참사관, 신용장상의 도착지 확인까지 하셨습니까?"

"도착지는 후쿠오카였지만 그건 놈들의 수작이요. 물품은 후쿠오카를 경유해서 타이페이로 갑니다."

문형호는 이를 악물었다. 일본에서 개설한 신용장까지 체크할 정도로 중국측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매달리고 있는 극동전자의 찰거머리같은 행위는 국익을 무시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일 뿐이다.

"내가 조처하지요."

위자영에게 자르듯 말한 문형호는 전화를 끊고나서 안동성 과장을 호출했다. 그는 통상본부 소속으로 한때 문형호가 직속 부하로 거느렸던 사내였다. 황급히 불려온 안동성은 문형호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지금 중국과 30억달러가 걸린 PCS 사업이 있어. 국내 업체중 하나가 입찰을 따내려면 중국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야."

눈을 부릅뜬 문형호가 앞에 앉은 안동성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놈들은 쥐꼬리만한 오더로 이 사업을 망치려고 하고 있어. 가만두면 안되겠어."

"하지만 국장님."

안동성이 넓은 얼굴을 들고 문형호를 보았다.

"도착지가 후쿠오카면 중국이 일본의 수입상까지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문제가 복잡한데요."

"일본의 수입상은 대만의 부탁으로 신용장을 개설했을 뿐이야. 물품은 틀림없이 후쿠오카의 CY에서 타이페이로 간다구."

열이 뻗친 문형호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극동전자 놈들이 대만 수입상과 짜고 한 짓이란 걸 자네는 모르겠나?"

"그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극동전자 사장한테 주의를 주었는데도 이따위 장난을 한 거야. 자네가 제재 조치를 강구해봐."

"잘 알겠습니다."

"중국 대사관측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절대로 나가게하면 안돼."

"예 국장님."

국장실을 나온 안동성이 길게 숨을 뱉고는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뒷수습은 나더러 하란 말이군."

이대진이 안동성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쯤 후인 오후 4시쯤이었다. 자신을 소개한 안동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후쿠오카로 KPS형의 무전기 5만개를 수출하게 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했지만 이대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만 수입상 호낙건이 일본의 대리인을 통해 신용장을 개설한지 만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안동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중국 대사관측의 항의가 있어서요.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오늘 저녁이 어떻습니까? 같이 저녁이나 할까요?"

"좋습니다."

장소를 정하고나서 이대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녁밥이 제대로 소화가될 것 같지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