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하일성의 세상만사 '천사들이 밝히는 사랑의 빛'
기사입력 2000년 01월 06일 14시 38분
새천년을 맞아 스포츠조선의 지면을 통해 애독자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또한 이런 글을 올릴수 있게 기회를 준 스포츠조선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2000년을 맞아 들떠있는 시간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많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넉넉지 못하고 여유가 없는 생활이지만 이런 분들을 위해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4일 밤 11시, 수원 신갈근처 상가건물 3층에 위치한 조그만 교회에서 희미한 불빛과 왁자한 웃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목사님을 비롯한 자원 봉사자들이 빵을 굽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방문과 칭찬에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동 한그릇을 먹고는 아직 일이 남았다며 구운 빵을 전달하러 총총히 추위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끔 TV출연 섭외를 받곤 하지만 `밤을 밝히는 천사'라는 이 코너의 섭외를 받고 처음에는 은근히 귀찮은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새벽 3,4시까지 촬영을 한다니 밤새 술 마시자는 약속도 아닌데 달가울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밤새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술집을 먼저 떠올리던 나로서는 안면있는 진행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 힘들어 마지못해 그 새벽에 끌려 나갔으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많이 놀랬습니다.
낮에는 시장에서 일을 하고 퇴근후에는 제빵기술을 배워 배고픈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식빵을, 재활원 아이들에겐 단팥빵을 구워주는 목사님과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산부인과에서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태어나는 새 생명을 위해 24시간 대기중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으며, 신림7동 난곡 종점옆 가건물에서는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해 이제까지 학력을 숨기고 살았다는 30대 주부가 낮에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새벽 2시까지 자본적이 없다는 61세의 할머니 학생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하 20도의 날씨에서도 하루밤에 10여 차례 전봇대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전기를 잇는 한전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밤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잠든 시간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에 감사함을 전달하겠다는 제작팀의 취지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9년 12월31일 밤부터 2박3일간 벌어들인 수입금 1억20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에 내놓은 것으로 뜻깊은 새천년맞이를 대신했습니다. TV에서는 정동진에 몰린 사람들도 보여줬고, 종로 보신각 타종행사에는 20만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뜻깊은 밤에 맹송맹송 안방에서 TV나 보고 앉아 있기 싫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 역시 가족들과 서해에 갈 계획이있지만 TV출연 때문에 취소했습니다.
새천년 맞이 행사준비와 뒷처리로 종로구청 청소행정과 직원들과 종로경찰서 직원들은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상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혼란없이 행사가 끝났고, 아침까지 청소를 하는 분들이 있어 다음날 종로거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밤을 밝히는 천사'라는 프로그램에 두어번 따라 나서본 탓일까요. 자원봉사자들과 빵을 구우며 밤을 지새는 목사님의 표정은 호화스런 고급호텔에 투숙을 했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직접 구운 빵인데 맛있으니 꼭 가져가시라고 들려준 옥수수 식빵이 아직도 따뜻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정을 무시한채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사고방식이 한탕주의나 변칙적인 과정을 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승부보다 큰 승부에 이기기 위해서는 역시 과정을 어떻게 충실하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은 콩나물을 키우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물을 쏟아 붓지만 그 물은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 이번주부터 금요일자 SC칼럼은 주철환 MBC PD 대신 야구해설가인 하일성씨가 맡습니다. 하씨는 야구이야기는 물론 세상살이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