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연가] 담백한 복고풍 '비바리 사랑'
기사입력 1999년 02월 08일 14시 32분
지난해 말미를 장식했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감독-씨네2000 제작)에서는 "사랑은 풍덩 빠지는 것인줄 알았는데,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이라더니 설날 시즌에 공개될 `연풍연가'(박대영감독-쿠앤씨필름 제작)에서는 "은근한 감정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여백의 사랑"을 펼쳐보인다.
`연풍연가'의 두 주인공, 태희역의 장동건과 영서역의 고소영은 격정적이거나 극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담백하고도 차분하게, 조금씩 움직이는 감정선을 따라갈 뿐이다. 이른바 `마음의 시계바늘'이 둘의 사랑을 싹틔운다.
세간에 유행하는 `야타'식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빨리 만나 뜨거워지는 연인들의 눈으로 보면 구닥다리의 느낌마저 들 정도.
그러나 태희와 영서에게는 복고풍의 사랑도 버겁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래서 사랑에 선뜻 손을 내밀기가 두려운 태희는 4박5일간의 제주여정에서 피어난 연정을 좀체로 내색하질 못한다.
사랑을 기다리면서도 모든 만남의 거리두기에 익숙한 제주도 비바리 영서도 마찬가지. 낯선 여행지에서의 들뜬 낭만적 사랑을 믿지 않지만 정작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을 향해서도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처럼 날 기억해 줄건가요"라는 말만 남길 뿐이다.
둘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사랑의 감정은 "저 남녀가 사랑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싶을 정도로 더디게 움직인다. 서두르지를 않는다. 오히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을 조급하게 만든다.
태희와 영서의 `사랑 만들기'에는 인위적인 로맨틱 무드가 질펀하다. 망설이듯 드러내는 감정, 닿을 듯 말 듯 스쳐가는 손길,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다가선 눈빛 등 `첨밀밀'을 떠올리게 하는 커트들이 적지 않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도 한몫한다. 국내 제1호 여류촬영감독 김윤희의 카메라가 신명날 만하다.
앞오름 고목나무 밑에서 태희를 기다리는 영서의 설렘과 초조, 그리고 낙심하는 모습을 한 프레임 안에서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잡아낸 장면은 `연출 촬영 조명'의 3박자가 잘 어우러진 `기억될 장면'. 이 장면의 여주인공 고소영 역시 근래 드문 호연으로 화답했다.
그동안 도회적이고 세련된 여성의 정형처럼 비쳐졌던 고소영의 청순하고 순박한 제주 섬 처녀로의 변신이 주효했다.(13일 서울극장)
[이창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