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25)
기사입력 1996년 04월 16일 14시 32분
**얼핏 보기에 남자 같았지만 그 젊은이는 분명 여자였다. **목엽은 목숨바쳐 대사를 … 동녘이 뿌옇게 밝아 오는 여명이었다. 목엽은 스러져 가는 모닥불 앞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옆에는 아귀가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두사람은 한적한 계곡의 고목 밑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보낸 것이다.
목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불그레하게 물들어 오는 동녘 하늘을 바라 보았다.
`아버님이나 무현왕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 해야 할 일이 있다. 다시 태어난 몸을 바쳐서 해야 할 무언가 중대한 대사(大事)가 있다.'
목엽의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지난날의 목엽이 아니었다. 삶에 절망하고 체념하여 흐느적거리던 폐인이 아니었다.
목엽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면 그일은 무엇인가?
동방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그 중대사는 무엇인가? 목엽은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버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까?"
그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아귀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목엽은 아귀가 춥지 않도록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더 얹었다. 모닥불은 타다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건너편 수풀에서 인기척이 일어났다. 목엽의 예민한 감각이 그러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리가 만무하다.
긴장하는 목엽. 지금은 외상(外傷)을 입고 있지 않은가. 이윽고 한 젊은 이가 천천히 말을 타고 나타났다.
이른 새벽의 사람은 그 내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떤 급한 일이 있길래 그렇게 서두른단 말인가.
그러나 젊은이는 바쁜 기색이 없다. 그는 모닥불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목엽은 순간적으로 상대를 틴� 본다. 젊은이는 머리를 가죽끈으로 질끈 동이고 보기 좋은 녹비의( 衣)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커다란 활을 들고 있었다.
말의 안장 뒤에는 사슴 한마리가 죽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을 나온 젊은이로 보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목엽의 눈매는 저절로 가느스름해졌다.
`여자로군.'
얼핏 보기에 남자같았지만 그 젊은이는 분명 여자였다.
늘씬한 체격에 약간 갈색이 도는 윤택한 피부와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어딘지 이국적인 인상을 주는 스무 살 정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닥불 앞에 이르자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뛰어 내렸다.
"새벽바람이 제법 차가운데 불을 좀 쪼이고 가도 되겠소?"
그녀의 음성은 투명하게 맑았으나 명쾌하고 당당한 어조가 역시 남자를 연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