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작고 한도신 여사 회고록
기사입력 1996년 03월 07일 16시 51분
## 이땅의 여인이 헤쳐온 가시밭길 인생 "당신 몸을 허락하겠소?" 잠이 확 깼다. 청을 받자마자 답하기가 부끄러워 뜸을 들였다.
"도신 씨, 당신 몸을 허락하겠소?"
"그러지요."
1915년 12월25일 밤.
결혼하고도 이틀 밤을 `그냥' 자던 17세 신랑은 사흘 째 밤 마침내 3세 위 신부에게 점잖게 제안했다.
이 신랑은 3년 뒤 평양 숭실전문학생으로 시국연설회에서 토한 열변 때문에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다. 이때부터 부부의 인생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찢기고 휘둘린다.
사상범 폭탄투척범 독립운동가 반동분자로 쫓기다 공산당의 총에 죽은 김례진.
그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2남4녀를 길러낸 아내 한도신의 신산한 인생 기록이 `꿈 갓흔 옛날 피 압흔 니야기'(돌베개 펴냄)다.
지난 86년 작고한 한 여사(92세)가 68세의 나이로 15년동안 쓴 회고록을 차남 김동수씨(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 교수)와 오연호씨(월간 말 특파원)가 정리한 것이다.
1919년 2월 길고 긴 그믐밤을 꼬박 새며 당목에 큰 태극기를 재봉했던 저자는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덕'에 살에 폭폭 박히는 `소좆몽둥이'에 온 몸을 내맡겨야 했으면서도 순사의 따귀를 후려치며 `독종'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런 여사도, 남편이 몰래 왔다 간 것을 모르고 "서방 없이 애를 뱄다"는 주변의 소리엔 속수무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서가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일화와 시대상을 꼼꼼히 적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선생의 장례를 지켰던 여사는 "선생님 호떡 좋아하셨지요"하며 호떡 다섯 개를 관 위에 놓고 울던 손기정씨의 모습은 물론 상해 시절 곁에선 본 독립운동가의 모습도 담담하게 털어 놓는다.
"인자하고 정이 굉장했지만 얼굴이 호랑이 상인데다 약간 얽어서 우리 애들은 좀 무서워했다"는 , 인물이 잘생기고 가슴에 복슬복슬 털이난 여운형….
이밖에 신혼 저고리에 차압딱지가 붙고 고무공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며 길러낸 자녀의 고통스런 삶을 지켜보아야 했고 남편의 짧은 `바람'에 가슴을 태워야 했던 여인네의 속내는 눈시울을 젖게 한다.
< 김태수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