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고도 말 못해'…속으로 앓는 명의거래 범죄 피해자들

2019-11-10 09:01:47

[정연주 제작] 일러스트

서울에 사는 A(22)씨는 "휴대전화를 개통해 넘겨주면 기계 가격을 현금으로 돌려주겠다"는 고등학교 동창 B씨의 제안에 응했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끙끙 앓았다.



B씨는 기계 대금의 일부만 치른 뒤 "밀린 돈은 몇 대를 더 개통해오면 한 번에 주겠다"며 휴대전화를 더 가져오라고 했다. A씨는 가족과 친구들 명의까지 빌려 총 20여대의 단말기를 개통해 넘겼으나 돌려받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통신요금만 3∼6개월치 내면 된다'던 당초 약속과는 달리 B씨에게 넘긴 모든 휴대전화에서 소액결제가 이뤄졌다. 지난달까지 A씨가 뒤집어쓴 소액결제 피해는 6천만원에 달했다.

A씨와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싶어 경찰서를 3곳이나 방문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경찰이 "수사를 원하면 민원실에서 정식으로 고소하라"면서도 "피해자도 불법 명의거래에 가담한 셈이라 만만찮은 벌금을 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A씨의 가족은 10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피해액도 감당 안 되는데 벌금까지 물게 되면 더 힘들어진다"며 "우리가 신고를 못 할 것을 알고 가해자 쪽에서 기세등등하게 협박해오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현행법상 명의거래는 명백한 불법이며, 대포폰이나 대포통장 등 범죄과 관련된 목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노숙인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명의가 도용 또는 거래되는 일이 많지만, A씨와 같이 지인에게 속아 명의를 넘겨주는 사례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문제는 A씨처럼 수사기관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불이익이 두려워 내키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불법 명의거래 범죄는 수사에 품은 많이 들지만 실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경찰이 적극 나서지 않는 사건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피해자인 동시에 범죄자'라는 경찰의 말에 당사자가 위축되기도 쉽다.

한 일선 경찰서 수사관은 "경찰이 몇 달을 쏟아 불법 명의거래 피의자를 검거해도 그만큼의 보상이 없어 동기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피해액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로 노력만큼 업무성적에 반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형 감경 사유 등을 충분히 설명해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경찰의 의무"라며 "사법기관이 판단해야 할 벌금 액수 등을 언급하며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뉴스에는 청년들 내구제('나를 구제하는 대출'이라는 뜻의 신조어) 피해가 심각하다는데 막상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도 처벌받는데 (신고)할 거냐'는 말이 먼저 나온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에 언급된 '내구제 피해'는 급히 돈이 필요해 대출받을 길을 찾다가 명의거래 범죄에 연루된 사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의거래 피해자가 수사기관의 도움을 얻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려는 취지를 글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국회에서도 이와 관련한 지적이 나왔다. 지난달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은 "불법 명의거래로 만들어진 대포폰·대포통장 등은 보이스피싱·성매매 등 각종 범죄에 사용돼 단속을 어렵게 만든다"면서 "정작 명의도용을 당한 피해자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할 때가 많다"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이 피해 당사자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면서도 "시스템 차원에서 (불법적 거래가) 걸러질 수 있도록 금융기관이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경찰과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roowj@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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